[단독] 이름·번호 바꾸며 삶에 의지 드러냈는데…가해자 선고 직전 극단 선택

<한국일보, 16세 소녀 죽음 추적>
또래들 “성폭행 당한 애, 같이 갈구자”
죽어서야 밝혀진 진실 ‘끔찍한 2차 가해’
“엄마아빠 미안해요” 유서에 부모 통곡
“가해자 엄벌해야” 부모 소원 이뤄질까

혜린(가명·16)은 그날따라 기분이 좋았다. 가을 옷이 필요했는데, 평소 눈여겨봤던 아크메드라비 후드티를 아빠가 결제해줬기 때문이다. 외출하기 전엔 집에서 엄마랑 김장을 하면서 수다를 떨었다.

그러나 웃으면서 집을 나갔던 혜린은 그날 밤 울면서 귀가했다. 그리고 방문을 잠가버렸다. 엄마가 몇 차례 노크했지만 인기척을 보이지 않았다. 문을 잠그는 일도 드물지만, 적어도 엄마 부름에 대답은 했다. 엄마는 느낌이 좋지 않았다. 급하게 아빠를 불러 문을 따고 들어갔지만, 혜린은 방에 없었다. 베란다 창문이 열려 있을 뿐이었다.

슬픔도 잠시였다. 부모는 딸의 선택을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죽을 아이가 절대 아니었다. 울면서 돌아온 딸에게 말 못할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유서엔 누군가의 휴대폰 번호가 적혀 있었다. 사건의 실체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혜린이가 부모에게 진실을 밝혀 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엄마 아빠는 딸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딸을 위해 부모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

 

부모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딸이 유서에 남긴 번호로 전화했더니 혜린이 친구가 받았다. 부모는 그 친구를 통해 혜린이가 페이스북 단체 채팅방에서 또래에게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한 사실을 알게 됐다. ‘아이는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던 것일까.’ 엄마아빠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혜린이의 과거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딸의 페이스북 계정에 접속하기 전엔 잠시 망설였다. ‘판도라 상자’를 여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들춰내서 읽어야 했다. 도대체 딸이 왜 죽었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2020년 9월 24일 오후 8시42분. “너 혜린이랑 잘 때 조심해. 강간으로 신고당해.” A양 등 또래 10명이 모인 채팅방에서 B군이 혜린의 남자친구에게 말했다. 혜린의 남자친구가 “너가 무슨 상관이냐”고 따지자, B군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진짜 걱정돼서 하는 소리야. 혜린이가 선배랑 술 먹고 떡 치고 강간으로 신고했거든.” 혜린의 남자친구는 한동안 답하지 않았다. 혜린도 침묵을 이어 갔다. 혜린이 그토록 숨기고 싶어 했던 피해 사실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까발려졌고, 성폭행을 신고했다는 이유로 손가락질받는 상황이 됐다. 혜린은 부모에게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성폭행당한 사실이 알려지는 걸 극도로 꺼렸던 탓이었을 거다.

5시간이 지난 다음날 새벽. 조용해진 단체 채팅방에서 A양이 다시 불을 지폈다. “아니 그래서 이건 어떻게 되는 거야? 혜린이가 걸레라는 게 팩트인겨?” A양은 평소 혜린을 협박해 돈을 뜯어내고, 심한 욕설을 해온 문제적 인물이었다. A양은 혜린이 인스타그램에서 수백 명의 팔로어가 생기며 인기를 얻자 “꼴 보기 싫다”며 게시물을 내리게 할 정도로 혜린을 괴롭혀 왔다. 온라인에서의 공격도 혜린과 같은 반이었던 A양 주도로 이뤄졌다. A양은 대화가 잠잠해지면 “같이 갈구자(괴롭히자)”며 아이들을 부추겼다. A양이 어떻게 혜린의 성폭행 피해 사실을 알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성폭행 피해자였던 혜린을 ‘걸레’라고 칭하며 욕을 했다.

A양은 심지어 또래들이 모인 페이스북 단체방에 다른 지역에 살고 있던 C양까지 불러들였다. C양이 학교를 다니는 지역은 혜린이 전학을 고려하고 있던 곳이었다. “혜린이, 너네 동네로 이사 간대. 애들한테 소문 좀 내줘.” A양의 부탁에 C양은 동조했다. C양은 혜린에게 “개X같이 생겼다”며 혜린의 외모를 비하했고, “까불지 말고 싸가지 챙기고 댕겨. 여기 와도 받아줄 사람 없어”라고 퍼붓기도 했다.

부모가 딸의 ‘판도라 상자’를 열어보니, 딸이 겪었던 고통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극단적 선택을 하기 사흘 전, 혜린은 단체방에서 온갖 조롱과 모욕을 당했다. 부모가 보기에, 지옥이 있다면 아마도 그 방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부모는 페이스북 대화들을 토대로, 혜린이가 수개월 동안 A양에게 끌려 다니며 오프라인에서도 괴롭힘을 당해온 사실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사고 당일 역시 혜린은 엄마와 약속한 귀가 시간 전에 집으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올 수 없었다. A양이 가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A양은 혜린이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채팅방에 혜린의 남자친구를 포함해 또래 아이들을 불러 놓고 혜린에 대한 험담을 늘어놨다. ‘혜린이는 걸레다’ ‘혜린이는 좀 맞아야 한다’며 지겹도록 쏟아냈던 말들을 또 다시 했다. 답이 없는 혜린에게는 계속해서 페이스북 메시지를 확인하라며 화를 냈다.

A양을 비롯한 가해자들은 자신의 행동이 범죄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때리고 신고 당하겠다”는 A양에게 C양은 “이번에 또 일 터져서 신고 당하면 바로 6호”라고 말했다. 법의 심판을 받는 것도 두렵지 않은 듯했다. A양은 1호부터 10호까지 있는 법원의 보호처분 중 1호, 2호, 4호 처분을 받았다는 C양에게 “다행이네ㅎ”라고 말한다. 부모의 슬픔과 탄식은 어느새 충격과 분노로 바뀌고 있었다.

 

2019년 성폭력, 그리고 이어진 2차 가해

지난해 9월 24일은 혜린이가 극단적 선택을 하기 사흘 전이다. 엄마는 그 날의 기억을 끄집어내야 했다. 딸의 극단적 선택과 관련한 단서를 하나라도 더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혜린이가 평소 강간 사건 이야기는 안 하는데, 그날은 유독 ‘내가 잘못한 일이야?”라고 물었어요. 그래서 ‘너가 잘못한 거 아니야. 가해자는 감옥에 갈 거야’라고 말해줬거든요.” 지금 보니 단체방에서 A양 등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날 엄마에게 했던 말이었다.

혜린이는 2019년 11월 처음 본 남학생으로부터 강간을 당했다. 가해자 전모(18)군은 동네 후배들을 시켜 혜린을 모텔로 오게 한 다음 술을 먹이고 몹쓸 짓을 했다. 전군 지시에 따라 아이들은 바람잡이 역할을 했다. ‘예전에 빌렸던 돈을 갚겠다. 택시비를 내주겠다’며 평소 친하게 지내던 혜린과 혜린 친구를 모텔로 유인했다. 후배들은 혜린이 알지도 못하는 전군이 같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전군과 혜린이만 모텔방에 남도록 유인했다. 전군은 당시 가명을 써가면서 자신을 철저히 감췄다.

“죄질이 매우 좋지 않고, 소년보호처분으로 보호관찰기간 중 범행을 저질렀으며, 피해자들이 겪은 성적 수치심과 정신적 고통이 극심하다.” 지난해 10월 8일 인천지법 제12형사부는 전군에게 장기 5년에 단기 3년 6개월을 선고했다.

하지만 혜린은 자신을 유린했던 전군이 처벌 받는 걸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가해자 선고기일을 열흘 앞두고 혜린이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 혜린은 피해자였는데도 또래 집단으로부터 위로와 지지를 받지 못했다. 오히려 성폭행 사건이 약점으로 남아 공격을 받았다. 혜린은 경찰에 사건을 신고한 후에도 계속 괴롭힘에 시달렸다. 전군 후배들은 “왜 별 거 아닌 일로 신고를 했느냐”며 혜린을 압박했다. 가해자와 측근들은 점점 더 당당해졌고, 피해자인 혜린이는 움츠러드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2018년, 터 놓지 못했던 또 다른 강간 사건

2019년 11월 전군에 의한 강간 사건이 벌어지기 며칠 전, 엄마는 다락방에서 우연히 혜린의 휴대폰을 보게 됐다. “강간인 줄 몰랐다. 두 번 다시 협박도 하지 않겠다.” 누군가가 딸에게 보낸 페이스북 메시지에 엄마의 심장은 ‘쿵’하고 내려앉았다. 2018년에도 딸에게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엄마가 무슨 일인지 파악하고 해결하려던 참에 강간 사건이 터졌다. 그때는 아이 마음이 다칠까봐 도저히 2018년 사건까지 물어볼 수가 없었다.

엄마는 혜린이 중학교 2학년 때 갑자기 머리를 염색하고 피어싱을 한 게 자신을 지키려 했던 행동임을 지금에서야 알게 됐다. 착하기만 한 아이였는데 갑자기 강해 보이고 싶어하는 느낌을 받았다. “주짓수 같은 격렬한 운동도 배우려고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혜린은 2018년 말부터 손목을 그으며 자신을 학대했다. 처음 당했던 강간 사건이 혜린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함경애 신라대 상담치료대학원 겸임교수는 “신체적 고통이 느껴지는 순간엔 괴로운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자해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부모는 아이가 그저 사춘기를 심하게 겪는 것이라고 여겼다. ‘중2병’으로 생각했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오였다. 혜린의 사망 후 부모가 발견한 딸의 일기장에는 혜린이 홀로 감당했을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지난해 7월 딸은 ‘말하고 싶지만 반응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 이야기를 하면 내가 너무 끔찍해 보일까봐 무섭다’고 적었다. 성폭행 피해 사실을 밝혔을 때 우리 사회가 피해자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봤을지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혜린은 ‘누구 한 명을 죽일 수 있다면 고민 없이 걔를 죽일 거야. 매일 다짐하고 있어’라며 가해자로 짐작되는 인물을 증오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피해자는 사실을 숨기려는데 엄청난 에너지를 쏟게 되는데, 이는 사건이 드러났을 때 피해자에 대한 공격이 가중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며 “가해자를 엄벌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혜린은 엄연한 피해자였지만 불이익이 두려워 피해 사실을 숨겨야 했고, 사건이 알려질까봐 전전긍긍하며 살았다. 2019년 9월에는 이름과 전화번호까지 바꿨다. 일기장에 쓴 것처럼,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질 못하길 바랐던 것이다.

 

최근까지도 삶에 대한 의지 드러냈는데

지난해 9월 27일 밤, 딸이 방에 없음을 확인하고 부모가 아파트 1층으로 뛰어 내려갔을 땐 이미 경찰차와 구급대가 와있었다. 마지막 선택을 하기 전, 혜린이 스스로 신고했기 때문이다. 본인의 안 좋은 모습이 빨리 수습되길 바랐던 것 같다.

부모가 더 가슴 아픈 건, 딸이 그토록 어려움을 겪고도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는 것이다. 다음날 경찰에게 ‘그냥 죽을 아이가 아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고 말했던 것도 딸의 다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혜린의 노력은 그가 쓴 일기에도 잘 드러나 있다. 2019년 7월 혜린은 일기장에 ‘메이크업 학원 다니기’ ‘운동하기’ ‘햇빛 보기’ ‘독서’ ‘좋은 친구 만나기’ 등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나열하며 삶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2019년 10월엔 취업에 도움이 될 만한 자격증이라고 생각했는지, 일러스트 2급 자격증을 취득했다.

자신감을 얻은 탓인지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엔 “요즘 자존감이 최고예요”라고 엄마에게 말할 정도였다. 인스타그램에 수백 명의 팔로어가 생기자, 혜린은 이를 부모에게 자랑하기도 했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그날 오전엔 자해할 때 써왔던 커터칼을 엄마에게 건네며 “이제 안 그럴게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랬던 혜린이는 사고 당일 오후 A양을 만나러 나갔고, 밤 10시쯤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성폭행과 이어진 2차 가해. 혜린이 받았을 스트레스는 죽음을 선택해야 할 정도의 고통이었던 것 같다. 이진숙 부산여성가족개발원 연구위원은 “성폭력 사건이 있었고, 이로 인해 사이버 불링(Cyber bullyingㆍ온라인상 괴롭힘)과 오프라인에서의 괴롭힘이 계속되지 않았나. 아이가 또래 집단에서 버텨내기가 힘들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혜린은 실제로 버텨내기 힘들었던 것 같다. 혜린은 자신에게 잘못이 없음에도 A양과의 대화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이는 폭력 상황에 노출될 때 피해자에게서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이다. 이진숙 연구위원은 “자기 탓을 하는 건 폭력 피해자의 전형적 특징”이라며 “아이가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면 새로운 환경에 놓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해결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혜린이 남긴 마지막 말 “사랑해요 엄마아빠”

해결책을 제시하기엔 너무 늦었던 걸까. “사랑해요 엄마아빠.” 혜린은 지난 9월 27일 부모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딸은 유서에서 엄마아빠 딸로 언니의 동생으로 살아서 행복했다고 적었다. 혜린이는 ‘많이 속 썩이고 그랬는데 너무 죄송하다. 다음에 엄마 딸로 태어나면 이 기억 간직하고 속 안 썩이고 같이 백화점도 가고 같이 놀러도 가겠다’며 가족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드러냈다. 혜린은 ‘눈 뜨고 죽는 건 무섭다. 이불 좀 챙겨가겠다’며 죽음을 앞두고 느꼈을 두려움을 고스란히 드러내기도 했다.

혜린의 부모는 고심 끝에 한국일보 인터뷰에 응했다. 가해자들이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강간 사건의 가해자인 전군은 형량이 과하다며 재판부에 항소했고, 기각되자 이에 불복해 다시 대법원에 상고장을 제출했다. 2차 가해를 일삼았던 A양 등은 경찰 조사를 받고 지난해 11월 기소의견으로 인천지검에 송치됐다.

아빠는 수천 건이 넘는 딸의 페이스북 메시지 대화내역을 엑셀 파일로 정리하고, 딸의 계좌이체 내역을 파악해 경찰에 증거로 제출했다. 교통카드 기록을 토대로 딸이 A양 등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끌려다녔을 동선도 분석했다. “가해자들은 혜린이를 집요하게 괴롭혔어요. 딸은 세상을 떠났지만 가해자들은 지금도 누군가를 괴롭히고 있을지도 몰라요. 이들에게 잘못된 행동을 하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요.” 딸을 잃은 혜린이 부모의 소원은 과한 것일까.

※본 기사는 유족 및 유족 측 변호인과의 충분한 대화 끝에 동의를 얻어 작성됐습니다.

바카라사이트 채지선 기자 letmekno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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